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그라티온 작전 (문단 편집) == 소련군의 작전 입안, 준비 == 쿠르스크 전투 직후 시작된 우크라이나 탈환이 마무리되고 있던 1944년 3월부터 소련군 지휘부는 다음 공세의 기회를 찾기 위해 동부전선 각 지역을 점검했다. 논의 끝에 소련군은 벨로루시에 버티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면을 공격해 섬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동부전선의 다른 방면으로 주공을 돌릴 경우 벨로루시에 있는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측면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고 돌출부의 중부집단군을 견제할 만한 병력도 별도로 필요했다. 반대로 벨로루시에 대한 공세가 성공하면 중부집단군 자체를 분쇄해버릴 수 있었고, 북부집단군의 보급과 퇴로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을 격파하면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고 벨로루시를 넘어 폴란드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여 독일본토와 베를린까지 위협해 볼 수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 선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중부 뿐 아니라 '''동부전선 전체에 걸친 공세'''를 준비 중이었는데 벨라루스에서의 성공은 다른 전략적 공격 축선에서의 추가적인 공격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1944년 여름에 야심찬 4개의 대공세- 카렐리야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이아시-키시너우 작전]]을 계획 중이었다. 소련군의 계획은 동부전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공지역이 바로 벨로루시를 공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러시아 제국]]군 [[장군]]이었던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세에는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소련군 4개 전선군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공세 계획의 전모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부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만 알고 있었다. 보급과 작전 단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5개의 작전은 북에서 남으로 시차를 두고 진행될 것이었다. 마지막 전략 계획이 고안되기 전에 [[스타브카]]는 야전 조직과 그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규모가 큰 서부 전선군은 관리가 수월하도록 제2 벨로루시전선군과 제3 벨로루시전선군으로 나누어졌다. 다른 전선군들도 개칭되거나 담당 지역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세가 개시될 프리퍄티 습지 북쪽에는 카렐레야전선군, 레닌그라드전선군, 제1, 2, 3 발트전선군, 제1, 2, 3 벨로루시전선군이 배치되었다.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배치되어 추후 공세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제1 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주코프의 후임으로 [[이반 코네프]]가 임명되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타브카 대리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주코프는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제2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고, 바실렙스키는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았다. 한편 전선군 사령관들은 배치된 77개 사단과 5개 전차군단, 총 100만명의 군대로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확실한 전력 우위를 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전선군들에는 5개 야전군과 2개 전차군, 1개 폴란드 야전군, 11개 전차군단 등 총 40만 명이 증강되었다. 스탈린은 작전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2일에서 23일까지 독일 중부집단군과 대치중인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작전 회의에 불러들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중부집단군의 대부분을 [[민스크]] 동쪽에서 포위 섬멸하고 이 작전과 함께 이반 홉하네스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과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돌출부 북쪽 [[비텝스크]]의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돌출부 남쪽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개 전차 군단을 이끌고 프리퍄티 습지 바로 북쪽, 보브루이스크 주변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해 이중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제출했다. 복잡한 기동 작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은 보브루이스크 작전에는 심하게 반대했지만 로코솝스키는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회의 끝에 마침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적인 윤곽이 나왔다. 공세는 벨로루시 발코니의 독일군 진지의 남익과 북익에서 야전군 규모의 기동 집단이 각각 전술적 포위진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협조, [[스몰렌스크]] 북서쪽에 위치한 돌출부 북쪽의 비텝스크를 포위하고,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돌출부 남쪽의 보브루이스크를 포위한다. 동시에 북쪽에서 비텝스크 돌파가 성공하면 협조한 제5근위전차군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이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협조하여 독일군의 후방인 민스크를 향해 종심 깊은 포위전을 실지한다. 제1발트전선군은 북익을 보호하기 위해 드비나 강 서안을 따라 동프로이센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한다. 제1벨라루스전선군 좌익에서는 추후,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서 코벨 지역으로부터 비스와 강을 향해 제2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한다. 공세 날짜는 잠정적으로 6월 15일에서 20일로 결정되었다. 스타브카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기본 지침을 5월 31일에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의 보급품을 옮기고 전선군을 따라 수많은 부대들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 즉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집결해 있는 갈리치아에서 주공이 있을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무에 모든 일은 극도의 기밀 유지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원안대로 시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졌고 작전 날짜는 갈수록 연기되었다. 계속 작전이 연기되자 스탈린은 아예 공세 날짜를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에 벌어진 것을 복수하는 의미로 6월 22일로 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